Monday, February 28, 2011

88올림픽 유치2 - 선더버드 작전

88올림픽 서울 유치2

바덴바덴은 19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결정, 한국인에게 친숙해진 도시다. 하지만 81년 9월20일 한국 올림픽 유치단이 도착했을 당시 그곳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숙소를 구할 수 없었다. 유치위원 및 지원단 90명, 기자단 15명 등 대부대가 몰려가자 IOC 사무처에선 “도대체 이 자들이 뭐 하러 왔나?”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 올림픽 유치단, 바덴바덴에 도착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IOC가 올림픽 개최준비 상황을 보고하라고 요구했을 때 아무 설명 없이 깔아뭉갠 나라였다. 바덴바덴 숙소선정 등 편의제공을 위해 유치단 명단과 숫자를 사전에 알려달라고 했을 때도 시치미를 떼고 무시했다. 그런 나라가 개최지결정 총회를 열려는 마당에 떼로 몰려와 숙소를 요구한다? IOC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ID(신원 확인)카드를 내준 것만도 '크게' 봐준 거였다.

한국은 회의장 부근에 숙소를 얻지 못했다. 변두리로 나가 숲속 산장 형 호텔을 겨우 찾아 여장을 풀었다. 조상호 한국올림픽위원장은 IOC 사마란치 위원장, 베를리우 사무총장을 찾아가 인사 겸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개 닭 보듯' 했다. 서독 언론은 “한국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지만 올림픽 유치는 웃기는 얘기다. (사실상 나고야로 결정됐고 한국은)개최지 결정투표 때 몇 표를 얻느냐만 관심”이란 요지의 기사를 썼다.

올림픽 유치 '바덴바덴 드라마'
1988. 6. 1 [경향신문] 11면 

현지인은 싸늘하고, 주최 측은 얕잡아보고, 제대로 된 숙소도 없고, 언론은 놀리고… 이러면 분한 마음에 "에잇, 한 번 해보자!"는 게 한국인 기질인가. 한국의 올림픽 유치단은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특히 정주영 유치위원장은 분을 참지 못했다. 서울에서부터 다들 '안 된다' 타령하는 게 싫어 "난관은 넘으라고 있는 거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소리 하지마라"며 위원장 자리를 맡았던 그다. "무조건 이겨야한다"고 결기를 다졌지만 뾰족 수가 마땅치 않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예산이 없다는 말에 사재까지 털었지만 시계(視界)는 참으로 깜깜 제로였다. 유치단 사이에서 "돈과 여자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IOC 위원들이라고 국제신사만 있다더냐?"는 얘기도 나왔지만 답답한 마음에 나온 황당한 아이디어일 뿐이었다.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국제 망신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대처론도 슬슬 머리를 들어 승부욕이 강한 그는 속마음만 끓이고 있었다.



아디다스 회장과 극비회동을 통한 협력약속

서울올림픽 투입·산출의 백서
1988. 9. 19 [매일경제] 19면

이때 박종규 전 대한체육회장은 아디다스의 홀스트 다슬러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국제 스포츠계 '큰손'으로 아버지 아디 다슬러(그의 이름과 성의 첫 3글자씩을 딴 게 '아디다스'다)의 사업을 세계화하는 데 수완을 발휘한 그는 국제경기단체 수장들을 수하처럼 잡고 있었다. 사마란치는 물론 중남미의 바스케스 세계올림픽연합(ANOC)회장,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FIFA)회장 등이 다슬러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당시 IOC가 상업적으로 타락했다는 얘기를 들은 건 다슬러 때문이었고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다.

박종규가 그를 만난 것은 그러니까 ‘한방’을 꿈꾼 거였다. 그게 천둥을 몰고 오는 '선더버드 작전'의 요체였다. 박종규는 박정희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 유치를 끈질기게 설득해 성사시킨 사람이다. 박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치계획이 공중에 뜨고 자신도 초야에 묻히는 신세가 됐지만 그는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았다. 공식대표단도 아닌 그가 민간유치단에 합류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바스케스와의 막역한 관계를 업고 '큰손' 다슬러를 접촉하면 사마란치도 움직일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박종규와 다슬러는 결국 극비회동을 통해 '서울올림픽 협력'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진다. 다슬러가 IOC위원 40명의 표를 서울에 몰아주는 대신 한국이 그의 사업권을 보증했다는 설이 돌았다. 올림픽에 걸린 이권 일부를 다슬러에게 넘기는 뒷거래가 성립됐다는 얘기였다. 다슬러는 겉보기엔 시골 신발가게 주인 같지만 수완 덩어리 국제 장사꾼이다. 올림픽 광고권, 협찬사 선정권 등 약속 없이 개도국이자 분단국이며 휴전중인 한국의 유치를 도와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정주영은 박종규의 신원보증까지 서주지 않았던가.



한국, 미인계와 꽃선물까지 ‘지극정성’

물론 다슬러의 도움만으로 한국이 올림픽 유치라는 큰 떡을 먹은 건 아니었다. 유치위원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한 이틀 후인 9월22일 서울올림픽 유치전시관 개관식이 열렸다. 옛 바덴바덴 기차역에 차린 전시관에선 미스코리아 출신 3명과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5명이 안내역을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나긋나긋 미소 지으며 유창한 영불어로 설명하는 한국관은 금세 인기를 독차지했다. IOC 위원들 중엔 몇 번이고 한국관을 찾은 이도 적잖았다.

그런데 이 개관식에 한국 IOC위원 김택수의 모습이 안 보였다. 수배해보니 그는 그 시간 파리에 있었다. 본국의 긴급공문을 받고서야 황급히 바덴바덴에 돌아온 김택수에게 정주영이 넌지시 물었다. "각국 IOC위원에게 김 위원 명의로 꽃바구니를 보내고 싶은데…" 그러나 김택수는 고개를 저었다. 국제 명사인 IOC위원들에게 그런 유치한 공세는 격에 안 맞고 더구나 자신은 '쪽이 팔려'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한국이 미인계를 쓴다"
1988. 6. 2 [경향신문] 11면 

"함자 위원에 국빈 대접"
1988. 6. 16 [경향신문] 11면 

그러나 이튿날부터 80명 IOC 위원들 방에는 소담한 꽃바구니들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안엔 문안인사를 적은 예쁜 카드가 들어 있었다. 물론 발신인은 김택수가 아니었다. 조상호 한국올림픽위원장과 정주영 서울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 명의였다. 매일 아침 IOC위원들은 한국인만 보면 "꽃이 참 예쁘다. 한국인들은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묻지도 않았는데 "전시관도 서울이 나고야보다 훨씬 낫다. 상냥하고 미인도 많다."며 웃기도 했다. 마른 땅에 싹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아시아 스포츠계 거물이자 말레이시아 IOC위원인 함자는 바덴바덴에 오지 않았다. 한쪽 발을 다쳐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일본보다 한국에 가까운 그가 오지 않으면 1표를 잃는다고 판단한 유치단은 본국에 '함자 특별수송 작전'을 요청했다. 주 말레이시아 대사가 페낭 휴양지에 머물던 함자를 찾아가 호소했다. 함자가 탄 비행기가 바덴바덴에 가는 도중 기착지마다 한국외교관이 찾아가 인사를 하고 매우 정중하게 "아픈 발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바덴바덴에서 그는 한국 전도사가 됐다.



투표 하루전 유치도시 설명회에서 까지도..

물밑 한국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 애 쓰는 동안에도 일본은 느긋했다. 나고야가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공연히 안달 떨 필요가 없었다. 일부 표를 깎아먹는 언동이 있었으나 까짓 몇 표는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본은 새 IOC위원으로 쿠웨이트의 셰이크 파하드가 추천되자 "36세 어린 바람둥이를 국제 명망가들이 모인 IOC위원으로 선정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했다. 중요한 투표를 앞두고 해선 안 될 망언이었다. 한국에 부정적이던 파하드는 일본을 더 미워하게 됐다.

유럽인들의 변화도 감지됐다.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으로 잿더미에서 부활한 일본이 언제부터 유럽과 대등한 선진국이 됐느냐는 말이 나돌았다. '경제 동물'에게 두 번씩이나 (64년 동경개최에 이어 88년 나고야 신청) 올림픽 개최권을 줄 필요가 있느냐는 쑥덕거림도 있었다. 어떤 유럽위원은 한국 유치단에게 "아프리카 표를 잡아라. 거기 위원들에게 한국방문 비행기 1등석 티켓을 주면 호감을 살 것"이란 귀띔도 했다. 물론 그의 말은 실행됐다.

파하드는 나어린 돈환
1988. 6. 29 [경향신문] 11면 

AP통신 「백중세」 보도
1988. 8. 4 [경향신문] 11면 

9월29일. 개최지 결정투표를 하루 앞두고 유치도시 설명회가 열렸다. 나고야는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대충 설명을 끝냈다. 한국은 "올림픽이 언제나 부자만의 잔치일 수는 없다. 가난한 나라에게도 기회를 주어 화합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해주자"는 걸 새삼 강조했다. 그날 저녁 한국유치위원단이 수뇌회의를 갖고 표 분석을 했다. 서울이 40표, 나고야 25표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만의 손가락 셈법, 믿을 건 못됐다. 밤새 더 많은 IOC위원을 만나 마지막까지 득표몰이를 하자고 다짐한 뒤 회의는 끝났다.

드디어 30일 오후 3시 45분. 사마란치 위원장은 "쎄울 52, 나고야 27"이란 표결결과를 발표하고 자신도 못 믿겠다는 듯 다시 쪽지를 내려 봤다. 그리고 좀 전보다 더 큰소리로 "쎄울, 꼬레아!"라고 외쳤다. 바덴바덴의 기적, 단 열흘의 역전 작전이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던가. 춤추고 환호하던 한국인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다. 사마란치는 후일 "한국인의 열정이 신화를 창조했다. 일본에는 그것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추기: 84년 IOC는 한국의 정정불안을 이유로 서울의 올림픽 개최권을 박탈하려 했다. 노태우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은 로잔 집행위에서 "만약 개최지를 변경하면 잠실 올림픽스타디움에 IOC 위원들의 무덤을 만들겠다. 거기 묘비에는 IOC의 과오를 기록하고 자손만대로 그 과오를 기억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구가, 84년 LA올림픽은 공산권이 외면한 반쪽 대회였다. 88년 서울은 일부 행사 미숙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벽을 넘어서' '손에 손 잡고' 치른 화합의 무대였다. 한국은 그걸 계기로 선진국 문턱에 다가갔다.

난관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한국인의 불굴정신은 결국 88올림픽 이전에 민주화를 달성하는 근본 힘이 되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