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요한 크루이프 - 1974년 서독 월드컵

축구의 역사는 당대 가장 좋은 팀이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는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궁극의 영예는 개최국 서독에 돌아갔으나 전 세계 많은 축구팬들은 준우승팀 네덜란드를 축구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혁명적이고도 우아한 팀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이른바 ‘토털 풋볼(Total Football)’을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사하는 팀이었는데, 토털 풋볼이 시대를 초월해 축구라는 종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술적 이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 이 사나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이 그처럼 훌륭하게 실행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토털 풋볼을 위한 첫 번째 조건, 그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다.


토털 풋볼러(Total Footballer)
크루이프를 설명하기 위한 첫 머리에는 역시 토털풋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토털풋볼의 연원에 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1920년 전후 아약스와 네덜란드를 지도했던 잉글랜드 출신 감독 잭 레이놀즈로부터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1960년대 초중반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았던 빅 버킹엄의 공헌은 어쩌면 더 직접적이었는데 특히 그는 크루이프를 프로 무대에 데뷔시킨 장본인기도 하다. 다른 한 편으로, 1950년대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끄는 헝가리 대표 팀이 이미 토털 풋볼의 일부 개념(특히 포지션 체인지)을 활용하고 있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전체적인 스타일에 있어 틀림없이 ‘앞선 시대의 크루이프’로 간주될 만한 인물)야말로 ‘토털 풋볼러’ 그 자체였다는 견해들에도 당연히 일리가 있다. 또한 1960년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일부 클럽들에서도 이미 토털 풋볼과 같은 스타일이 시행되고 있었고, 1966 월드컵에서부터 스타가 된 ‘공격하는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는 가장 선명한 유형의 ‘토털 풋볼의 기수’로 평가받기도 한다.

‘토털 풋볼’의 위대한 사령관 요한 크루이프.
<출처 : wikipedia(Mittelstädt, Rainer)>

따라서 토털 풋볼은 거장 리누스 미켈스와 요한 크루이프만의 전유물은 아닌, 하나의 시대적 사조였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켈스-크루이프’로 이루어진 축구사 역대 최고의 ‘사제 드림팀’이 토털 풋볼의 아이디어를 가장 완성도 높은 형태로 체계화, 정립, 구현했을 뿐 아니라 파급력 및 역사적 영향력의 측면에서도 최고의 공헌을 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켈스와 크루이프가 ‘토털 풋볼의 표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토털 풋볼이란 무엇인가? 미켈스 감독은 상대가 볼을 빼앗아 나올 때 팀 전체가 뒤로 물러나 수비하지 않고 가급적 상대 골문과 가까운 위치에서 볼을 되찾아 공격을 재개하는 형태의 공격 축구를 원했다. 수비를 위해 완전히 후퇴한 후 다시 전진하는 축구는 도대체 효율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브라질 수준의 개인기 좋은 선수들이 팀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 한 이러한 방식으로 좋은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결국 미켈스의 선택은 수비 라인을 높은 지역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는 전방에서부터의 적극적인 ‘압박’으로 상대의 볼 소유권을 최대한 높은 지역에서 빼앗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실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선수들의 움직임은 ‘포지션’이 아니라 ‘공간’을 기준으로 펼쳐지게 됐다. 예를 들어 공격수들이 수비수의 역할을 수행, 상대를 압박해 볼을 탈취했을 때 효율적인 역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반대로 빈 공간을 파고드는 수비수나 미드필더의 공격 가담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동료가 비워둔 공간을 다른 동료가 메워주는 플레이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렇게 포지션과 역할을 수시로 변경하면서 ‘팀 전체가 공간을 기준으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토털 풋볼의 핵심이었다.

결국 토털 풋볼을 수행하는 선수들에겐 상황에 맞는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는 전술적, 공간적 센스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압박에 요구되는 체력, 그리고 무엇보다 수준급의 기본기까지 필요하게 됐다. 압박을 수행함에 따라 고갈되기 쉬운 체력을 최대한 안배하기 위해서는 아군이 볼을 지니고 있는 시간을 가급적 늘려야만 하는데, 이는 선수들의 기본기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미켈스의 위대한 구상이 그라운드 위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도 크루이프를 위시한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의 평균적인 우수성 덕택이었다.

특히 크루이프의 존재는 토털 풋볼의 완성에 있어 절대적인 것이었다. 크루이프는 스승 미켈스의 토털 풋볼 이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나이였을 뿐 아니라 판단력과 개인기, 스피드를 비롯 토털 풋볼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은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크루이프는 팀 전체의 ‘첫 번째 방아쇠’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크루이프가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나머지 동료들은 그의 발사에 맞춰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축구사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의 축구 두뇌와 모든 부문에 걸친 올라운드 재능이 아니었다면 실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16차례의 패스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네덜란드와 서독의 대결은 ‘토털 풋볼 vs. 토털 풋볼’이라 묘사될 수도 있으리만치 당대의 혁명적 사조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승부였다. 물론 네덜란드가 토털 풋볼의 정점을 치닫고 있던 팀인 반면 서독은 토털 풋볼의 기조가 다소 약화된 시점이었기는 하지만, 베켄바워로 상징되는 토털 풋볼의 일부가 서독에게도 남아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미 유럽을 제패한 클럽들인 아약스와 페예노르트 선수들로 구성된(롭 렌센브링크는 예외) 네덜란드는 감독 미켈스의 영도 하에 이미 대회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2차 조별리그에서 전 대회 우승팀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함으로써 토털 풋볼의 위력을 유감없이 떨쳐 보였다. 그 경기에서 크루이프는 자신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멋진 골을 터뜨렸으며 요한 네스켄스와 주고받는 플레이 또한 격찬을 받았다. 펠레는 떠났으되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존재했던 브라질은 결국 대회 4위에 머무르게 된다.

결승전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그리 어렵지 않은 우승을 예상했다. 실제로 경기 초반 그러한 예상은 잘 들어맞고 있었는데 특히 네덜란드가 터뜨린 완전무결한 첫 골이 그것을 예감케 했다. 크루이프의 킥오프로부터 시작된 네덜란드의 패스가 16차례 이어지는 동안 서독은 단 한 번도 볼을 만져보지 못했다. 볼은 결국 중원의 크루이프에게 되돌아왔고 크루이프의 드리블 돌파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까지 이어진 순간 급기야 서독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만다. ‘작은 요한’ 네스켄스가 그것을 성공시킴으로써 경기 시작과 더불어 스코어는 1-0. 네덜란드의 우수성이 다시금 증명된 장면이었다.

네덜란드는 단지 우승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독을 망신주기를 원했으며 첫 20분 동안은 그러한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나 서독은 베켄바워의 지휘 하에 그들의 주무기인 ‘신념’을 잃지 않고 있었다. 25분 경 베른트 횔첸바인이 얻어낸 페널티킥 장면에서 파울 브라이트너가 동점을 만들어냈고 베르티 포그츠는 투혼의 마크로써 크루이프를 묶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독은 게르트 뮐러의 골로 ‘예의’ 역전에 성공하고야 만다. 최고의 팀이 우승을 거머쥐지 못한 반면 개최국 서독은 20년 전의 ‘베른의 기적(무적 헝가리를 상대로 서독이 일궈낸 대역전 우승)’을 재현해냈다.

하지만 틀림없이 크루이프는 서독 월드컵 최고의 선수였고 그 해의 유럽 골든볼(발롱도르)도 베켄바워가 아닌 크루이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대회는 그의 선수 경력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본선이 되고 말았다. 1977년 10월 크루이프는 가족의 신변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국가대표 은퇴를 선택하게 되고,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우승 문턱에서의 좌절을 경험한다.


크루이프 턴
디 스테파노가 그러했듯 크루이프는 그라운드의 사령관일 뿐 아니라 개인전술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그는 이미 상대 선수를 제치는 일과 드리블에 매우 능숙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1974 월드컵 스웨덴 전에서 크루이프가 성공시킨 한 가지 동작은 크루이프의 뛰어난 개인전술을 전 세계 축구팬들 앞에 극명하게 드러낸 장면인 동시에, 기술과 두뇌를 겸비한 크루이프의 ‘창의적 발상’의 대표적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그 동작은 다름 아닌 이른바 ‘크루이프 턴(Cruyff Turn)’. 수비수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크루이프의 절묘한 ‘백힐 드리블’은 이후 세계 축구에 급속도로 펴져나갔고 축구 교본들에 등장하는 일반적 기술이 됐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축구황제 펠레와 매한가지로 월드컵 무대를 통해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페널티 패스
크루이프의 기발함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와 북미축구리그(NASL)를 거쳐 다시 네덜란드 리그로 돌아온 노장 크루이프가 커리어의 황혼기에도 불구, 여전히 녹슬지 않은 우아함을 과시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1982년 아약스가 헬몬트 스포르트를 상대했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차게 된 크루이프는 볼을 골문을 향해 차지 않고 왼쪽 앞으로 굴려버렸다. 이는 팀 동료 예스퍼 올센을 향한 ‘패스’였고 달려온 올센으로부터 다시 패스를 건네받은 크루이프는 어리둥절해 있는 골키퍼를 상대로 가볍게 득점을 터뜨린다.

이 페널티 패스(?)에 의한 컴비네이션 골은 축구사의 첫 시도로 기록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크루이프의 장난기어린 모험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먼 훗날, 크루이프의 ‘14번’을 흠모했던 아스널의 티에리 앙리는 로베르 피레스와의 유사한 컴비네이션 시도에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드림팀 바르셀로나
크루이프는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낸 대표적인 경우다. 선수 시절의 라이벌 베켄바워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들어 올렸다면, 크루이프는 클럽 축구계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성공들을 일궈냈다.

1988년부터 옛 소속팀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은 크루이프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스페인 라 리가 4연패의 업적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에 클럽 역사상 첫 번째 유러피언컵을 안겨줬다. 특히 크루이프 시대의 바르셀로나에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 로날드 쿠만(네덜란드), 미카엘 라우드롭(덴마크), 호마리우(브라질)와 같은 초특급 재능들이 존재, 바르셀로나 역사의 ‘초대 드림팀’으로서 영원히 기록된다.

선수 시절은 물론이고 지도자 시절에 이르기까지 크루이프 축구에 면면히 흐르는 토털 풋볼의 정신은 제자 호셉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지금의 바르셀로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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