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88올림픽 유치1 - 바덴바덴의 기적

88올림픽 서울 유치

1981년 9월30일, 한밤 11시45분. 잠도 잊은 사람들이 TV 앞에 바짝 당겨 앉았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한손에 발표문 봉투를 든 그도 긴장한 듯 멈칫거렸다. 좌중은 목이 타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짧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정적. 그걸 깨고 초성이 센 ‘꼬부랑’ 말씨가 TV를 탔다. “쎄울… 피프티 투(52표)!”



서울, 나고야 누르고 올림픽 유치하다

사람들은 사마란치의 뒷말, “나고야 트웬티 세븐(27표)”는 거의 듣지 못했다. ‘쎄울’ 소리에 벌써 세상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진 것이다. “해냈다! 서울이다!” 자정의 어둠을 날려버리는 고함이었다. 지구의 반대쪽 서독 바덴바덴은 그때가 오후 3시45분. 거기 IOC 총회장에서 한국대표단 역시 회의장이 떠나가라 같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겼다! 서울이다!”

세계가 깜짝 놀란 대이변이었다. 대한민국 서울과 일본 나고야가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를 놓고 경합을 벌인 끝에 서울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 IOC위원들의 투표결과가 나올 때까지 서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 유일의 IOC위원 김택수마저 그날 점심때 "내 두 손에 장을 지지는 한이 있어도 서울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었다.

승리 순간의 현지
1981. 10. 1 [동아일보] 3면 

국내언론은 물론 외신도 나고야의 승리를 예견했다. 한국은 불과 30년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민족전쟁을 치른 데다, 여전히 휴전 상태며, 가난한 개발도상국이고, 80년엔 민주항쟁 시민을 정부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나라였다. 올림픽을 개최할 능력,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게 이상했다. 그런 한국이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든 일본을 눌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국제 스포츠계 웃음거리가 된  88올림픽 서울 유치 선언
  
선더버드(thunderbird)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설에 등장하는 새다. 천둥 폭풍과 함께 나타난다는 그 새의 이름을 딴 ‘선더버드 작전’이 한국 올림픽유치위원단에 내려진 절체절명의 미션이었다. ‘몸도 다하고 숨마저 목에 걸린(絶體絶命)’ 벼랑 끝 위기지만 어떻게든 올림픽을 따낼 것, 안되면 모두 현직에서 물러날 각오를 하라는 엄포가 작전이름에 숨어있었다. 실제 어떤 유치위원은 고위층으로부터 “실패하면 사표를 내쇼. 어쩌면 지중해 푸른 물이 여러분을 기다릴지 모르오.”라는 진반 농반 협박을 듣기도 했다.

88년 올림픽 서울서 연다
1981. 10. 1 [경향신문] 1면 

알고 보면 웃기는 측면이 있었다. 한국은 몇 달 전만 해도 ‘올림픽개최 신청을 어떻게 명예롭게 철회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나라였다. 내각에선 올림픽 개최 찬반론이 맞서 고성이 오갔다. 비관론자들은 “올림픽을 따기 전에 쪽박부터 먼저 찰 것”이란 말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어떻든 올림픽 신청을 해본 나라로 만족하자”는 얘기도 많았다. 총리도 부정적이었다. 사실 유치선언 직후부터 서울올림픽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1979년 10월8일. 서울시는 거창한 기자회견을 열고 88년 올림픽의 서울 유치를 선언했다. 그러나 보름 후 10월26일. 유치를 재가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서거했다. 나라는 거센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빠져 들었다. 민주화가 당겨지리란 기대도 있었으나 꽃은 피기도 전에 시들었다.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하며 나라엔 폭풍우가 몰아쳤다.

80년. 5월 들어 ‘서울의 봄’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한밤에 집에서 끌려갔다. 광주에선 꽃다운 젊음들이 총칼에 스러졌다. 완전무장한 군인이 제 나라 국민을 쏘고 찌르고 짓이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계는 경악했다. 긴급조치로 국민을 재갈 물리며 정권을 이끌던 대통령이 최측근에게 살해된 게 불과 반년 전인데 이젠 잔혹한 국민 살상이라니….

그런 나라가 정식으로 올림픽 개최를 신청한 것 자체가 경이였다. 국제 스포츠계는 웃고 있었다. 한국이 되지 않을 일이란 걸 알면서도 ‘명분 쌓기’로 신청했다는 거였다. “아무렴 어때, 유치 경쟁하는 나라가 많아야 관심도 끌 것 아닌가.” 사마란치 등 올림픽을 이끄는 사람들 생각은 그랬다. 속마음 뿐 아니고 실제로 자기들끼리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

88년 올림픽 서울 유치 IOC에 공식 요청키로
1979. 10. 8 [경향신문] 1면 



국내에서조차 커지는 유치 철회 목소리  

그럼 한국은? 80년 8월 신군부의 리더 전두환 장군이 체육관선거로 대통령이 된 후 이규호 문교장관은 올림픽유치로 정통성 약한 정부의 이미지를 살리자는 생각을 했다. 박정희 시절 이미 유치선언을 했기에 IOC에 정식으로 서류만 올리면 됐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개최도시인 서울이 그러잖아도 적자인 시 살림이 거덜 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80년 10월27일엔 아예 그런 내용의 공문을 문교부에 보냈다.

한국 유치철회 소문만
1988. 2. 19 [경향신문] 9면 

그럼에도 전 대통령은 10월 28일 이 장관에게 올림픽 유치신청을 지시했다. 그는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사항을 특별한 사유 없이 변경해선 안 된다” 며 “역사적 사업을 추진도 안 해보고 패배의식에 젖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공식입장이야 그랬지만 전 대통령은 총칼과 폭력으로 세운 ‘얼룩진 정권’을 올림픽 개최를 통해 세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유치신청을 했으나 난관은 여전히 첩첩산중이었다.

81년 4월 IOC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집행위원회 회의에 한국이 참석해 올림픽 준비상황을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또 9월 총회를 여는 바덴바덴 시는 총회에 보낼 한국대표단과 기자단 숫자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두 요구를 다 묵살했다. 무슨 배짱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부 안에서 유치신청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비등했기 때문이었다. 유치 포기를 하자는 판에 무슨 개최준비를 설명하며 총회대표단 숫자를 통보하겠는가.



지더라도 망신은 당하지 말자는 절박감으로..

당시 남덕우 총리 주재로 열린 정부 올림픽 대책위에서는 총리 경제부총리 등 대부분이 한 목소리로 유치 철회를 주장했다. 80년 경제성장률이 -4.8%를 기록했는데 올림픽까지 치른다면 재정이 완전 파탄 날 것이란 주장이었다. 또 일본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해 봤자 형편없이 져 망신당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결국 일본에 밀사를 보내 우리가 올림픽을 포기하는 대신 86년 아시안게임을 열 수 있게 도와달라는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협상도 무참히 깨졌다. 일본 측이야 나고야 승리가 확실한데 공연히 한국과 뒷구멍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유치신청을 철회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IOC 사무처가 개최준비 설명조차 못하는 서울을 후보도시에서 제외하려 했으나 사마란치 위원장이 “어차피 나고야로 가지만 그래도 다른 도시와 경쟁하다 낙점 받는 모양을 연출하는 게 좋다” 며 살려줬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철회제의' 日선 시큰둥
1988. 2. 27 [경향신문] 9면 

이런 창피한 장면이 겹쳤기에 바덴바덴의 승리를 따냈는지 모른다.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하면 하프스코어도 안될 거란 위기감, 질 때 지더라도 노력해 망신은 당하지 말자는 절박감이 정부 안에 스며들었다. 우선 재외공관이 모두 나서 IOC 위원들을 포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한국이 해외에서 수주활동을 할 때 쓰는 ‘수법’도 쓰고 재계의 도움을 받으며 국제 스포츠계에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사람 역시 다 동원하자는 의견이 속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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