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제13회 멕시코 월드컵 - 1986년

제13회 1986년 월드컵은 북중미의 멕시코에서 5월 31일부터 6월 29일까지 총 30일간 치러졌다. 본래 1986년 대회 개최국은 남미의 콜롬비아로 확정된 상태였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크게 악화된 경제 사정으로 인해 콜롬비아는 개최권을 자진 반납해 버렸다. 이에 피파는 70년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을 갖고 있는 멕시코에 개최권을 넘겨 가까스로 1986년 대회를 강행시켰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1986년 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디에고 마라도나에 의해 주도되는 모습을 보였다. 마라도나는 이 대회 맹활약을 통해 아르헨티나를 통산 두 번째 우승으로 이끄는 한편,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로 올라서며 펠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멕시코, 1986년 5월 31일~6월 29일
참가국: 24개국
총 득점: 52경기 132골, 평균 2.54
총 관중: 2,393,331명, 평균 46,026
우승국: 아르헨티나(통산 2회)


지역예선
전 대회와 비교했을 때 각 대륙별 티켓 배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피파는 오세아니아를 아시아로부터 분리시켜 새로운 그룹으로 구분 짓는 한편, 오세아니아 그룹 1위 팀과 유럽 7조 2위 팀으로 하여금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함으로써 0.5장의 티켓을 따로 부여했다. 이처럼 오세아니아 측에 0.5장이 주어짐에 따라 유럽의 티켓은 14장에서 13.5장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남미,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티켓 수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 남미 지역예선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플레이오프 제도가 도입됐는데, 이는 각 조 2위 팀이 4강 토너먼트 방식으로 최후의 티켓 한 장을 놓고 다투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는 1986년 대회 지역예선에만 적용됐으며, 1990년 대회에는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자동 출전권을 부여 받음에 따라 각 조 1위 세 팀만이 본선으로 직행했다.

유럽의 경우는 전 대회 우승국 이탈리아가 자동 출전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플레이오프 제도를 도입해야 했다. 그로 인해 5개 팀이 아닌 4개 팀으로 구성된 1조와 5조의 2위 팀이 남은 한 장의 티켓을 놓고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며, 이 두 팀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판가름이 났다. 원정 1차전에서 0-1로 패한 네덜란드는 홈에서 2-1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 원정경기 득점 우선 원칙으로 인해 두 대회 연속 본선에 오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한편 오세아니아와 분리된 아시아의 경우 중동 그룹과 극동·동남 그룹으로 나뉘어 지역예선전을 치렀다. 이는 대한민국에게 한 층 유리함으로 다가왔는데, 일본과의 최종 결전에서 종합 스코어 3-1로 승리한 대한민국은 32년만에 본선으로 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밖에 중동 그룹에서는 이라크가 본선에 합류했으며, 오세아니아 1위 팀 호주는 스코틀랜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유럽 축구의 높은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룹대륙티켓예선참가국본선진출국
1유럽1.5폴란드, 벨기에, 알바니아, 그리스
플레이오프: 벨기에-네덜란드
폴란드
벨기에
2유럽2서독, 포르투갈, 스웨덴, 체코, 몰타서독
포르투갈
3유럽2잉글랜드, 북아일랜드, 루마니아, 핀란드, 터키잉글랜드
북아일랜드
4유럽2프랑스, 불가리아, 동독, 유고, 룩셈부르크프랑스
불가리아
5유럽1.5헝가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키프러스
플레이오프: 네덜란드-벨기에
헝가리
6유럽2덴마크, 소련, 스위스, 아일랜드, 노르웨이덴마크
소련
7유럽1.5스페인,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이슬란드
플레이오프: 스코틀랜드-호주
스페인
스코틀랜드
8남미1아르헨티나,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9남미1우루과이, 칠레, 에콰도르우루과이
10남미1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브라질
9남미1플레이오프: 콜롬비아, 페루, 칠레, 파라과이파라과이
11북중미1최종예선: 캐나다, 온두라스, 코스타리카캐나다
12아프리카2최종: 알제리-튀니지, 모로코-리비아알제리
모로코
13아시아12차: UAE-이라크, 바레인-시리아
최종: 이라크-시리아
이라크
14아시아12차: 대한민국-인도네시아, 일본-홍콩
최종: 대한민국-일본
대한민국
15오세아니아0.5호주, 이스라엘, 뉴질랜드, 대만 * 플레이오프: 호주-스코틀랜드-


본선 요약
지난 1974년부터 1982년 대회까지 유지됐던 2차리그 제도가 폐지되고 조별리그 후 토너먼트를 치르는 그 전 방식이 다시금 부활했다. 6개 조 1, 2위 팀들과 함께 3위 팀을 통틀어 가장 성적이 우수한 4개 팀에게 16강 진출권이 주어졌으며, 16강 이후부터는 토너먼트 단판제가 도입되어 대회 전체의 박진감을 고조시켰다.

조별리그에서 별다른 이변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련이 프랑스를, 덴마크가 서독을 따돌리고 1위로 16강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강호들이 무난히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덴마크의 조별리그 퍼포먼스는 대회 초반 화두로 떠올랐는데, 엘카예르와 라우드럽을 앞세운 공격력이 워낙 막강해 덴마크를 우승후보로 손꼽는 전문가들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독수리’ 부트라게뇨는 덴마크와의 16강전에서 혼자 4골을 폭발시켜 그 돌풍을 잠재워 버렸다.

32년 만에 본선에 오른 대한민국의 경우 3도움을 기록한 마라도나를 제대로 막지 못해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1-3 패배의 멍에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박창선이 기념비적인 월드컵 첫 득점을 성공시켰다는 점에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사상 첫 승점을 획득한 대한민국은 조별리그 탈락에도 불구, 충분히 만족스런 성과들을 손에 넣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8강전에서는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해 앙숙 관계로 떠오른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그리고 유로 1984 챔피언 프랑스와 브라질의 맞대결이 세간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사실상의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던 이 두 경기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 플라티니의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뒀다. 특히 마라도나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신의 손 득점’을 터뜨린 뒤 곧바로 6명의 선수를 제쳐내고 추가골을 성공시켜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원맨쇼를 펼쳤다.

프랑스 역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브라질을 누르고 4강에 올랐다. 그러나 부상 및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던 플라티니는 전성기 시절의 활약을 재현하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는 서독과의 4강전에서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었다. 반면 벨기에를 가볍게 제압하고 결승에 오른 아르헨티나는 서독마저 격침시키며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정상으로 이끈 마라도나는 이 대회 MVP로 선정됐다.

 


주요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의 이름을 빼놓고 1986년 월드컵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서독과의 결승전까지 대회 내내 맹활약을 펼친 마라도나는 월드컵 전체를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 밖에 마라도나와 함께 결정적인 순간마다 득점을 터뜨린 스트라이커 호르헤 발다노, 결승전 결승골의 주인공 호르헤 부루차가 등도 우승에 크게 공헌한 주역들로 손꼽혔다.

반면 마라도나 이외에는 그에 대적할 만한 수퍼스타가 눈에 띄지 않았다. 31세의 미셸 플라티니는 이미 전성기가 지나간 모습이었고, 동갑내기 칼-하인츠 루메니게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지쿠는 부상으로 인해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중반을 뜨겁게 달궜던 이들 4인방의 ‘세계 최고 쟁탈전’이 결국 마라도나의 완승으로 막을 내린 셈이다.

한편 잉글랜드의 게리 리네커는 6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종주국의 자존심을 세웠고, 브라질의 카레카와 스페인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그리고 덴마크의 프레벤 엘카예르 등도 꾸준히 득점포를 가동시키며 1986년 대회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수비진에서는 서독 수문장 하랄트 슈마허와 벨기에의 괴짜 골키퍼 장-마리 파프가 축구팬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수상기록
MVP
1위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2위 하랄트 슈마허(서독)
3위 프레벤 엘카예르(덴마크)

득점
1위 게리 리네커(잉글랜드/6골)
2위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5골), 카레카(브라질/5골),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스페인/5골)
5위 호르헤 발다노(아르헨티나/4골), 프레벤 엘카예르(덴마크/4골) 외 2명

베스트 팀
골키퍼: 하랄트 슈마허(서독).
수비수: 조시마르, 줄리우 세자르(이상 브라질), 마누엘 아모로스(프랑스).
미드필더: 얀 클레망스(벨기에), 장 티가나, 미셸 플라티니(이상 프랑스),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공격수: 프레벤 엘카예르(덴마크),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스페인), 게리 리네커(잉글랜드).


멕시코 월드컵 이모저모
01
지난 1962년 칠레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역시 월드컵 직전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복구 사업에 막대한 힘을 기울여야 했다. 1985년 9월에 일어난 이 지진은 1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발생시켰지만, 경기장 시설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멕시코는 1986년 월드컵 개최를 강행할 수 있었다.
02
우고 산체스와 하비에르 아기레 등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을 앞세운 멕시코 대표팀은 역대 최강의 전력이란 호평을 받았다. 그로 인해 멕시코 국민들의 기대치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멕시코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엄청난 결근율 및 손님 부족으로 인해 공장, 식당, 극장 등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멕시코는 최소 4강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서독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분루를 삼켰다.
03
한편 서독은 1985년 10월 포르투갈과의 지역예선전에서 0-1로 패한 바 있는데, 이는 독일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월드컵 지역예선 패배였다. 서독은 나치 독일 시절까지 포함, 포르투갈에 패하기 전까지 지역예선 통산 32승 4무를 기록하고 있었다.
04
16강에서 덴마크를 완파하며 내친 김에 결승 진출까지 노렸던 스페인은 벨기에와의 8강전을 앞두고 단체 설사를 일으키며 곤혹을 겪었다. 결국 스페인은 승부차기 끝에 8강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는데, 멕시코 사람들은 이를 ‘목테수마의 복수’라 일컬으며 통쾌해 했다. 목테수마는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아스텍 제국 제 9대 황제의 이름이다.
05
디에고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손으로 득점을 성공시킨 뒤 “내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볼을 밀어 넣은 것” 이란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로 인해 마라도나의 이 반칙은 ‘신의 손 득점’이란 별칭으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06
이에 잉글랜드 언론들은 “마라도나가 성공시킨 두 번째 골은 박수를 보내야 마땅한 묘기였지만 첫 번째 골은 엄연한 반칙이었다. 게다가 마라도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자신의 반칙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마라도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라도나가 바로 축구의 신이기 때문” 이라며 잉글랜드 측에 반박했다.
07
마라도나는 벨기에와의 4강전에서도 혼자 두 골을 성공시키는 원맨쇼를 펼쳤는데, 이에 벨기에의 티스 감독은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서는 12명의 선수가 필요하다” 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08
아르헨티나와 서독의 결승전에서 멕시코 홈 관중들 대부분은 아르헨티나를 열렬히 응원했다. 여기에는 유럽에 대한 중남미 국가들의 반발심이 작용했을 뿐 아니라, 8강전에서 멕시코를 승부차기 끝에 침몰시킨 국가가 바로 서독이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요한 크루이프 - 1974년 서독 월드컵

축구의 역사는 당대 가장 좋은 팀이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는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궁극의 영예는 개최국 서독에 돌아갔으나 전 세계 많은 축구팬들은 준우승팀 네덜란드를 축구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혁명적이고도 우아한 팀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이른바 ‘토털 풋볼(Total Football)’을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사하는 팀이었는데, 토털 풋볼이 시대를 초월해 축구라는 종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술적 이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 이 사나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이 그처럼 훌륭하게 실행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토털 풋볼을 위한 첫 번째 조건, 그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다.


토털 풋볼러(Total Footballer)
크루이프를 설명하기 위한 첫 머리에는 역시 토털풋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토털풋볼의 연원에 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1920년 전후 아약스와 네덜란드를 지도했던 잉글랜드 출신 감독 잭 레이놀즈로부터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1960년대 초중반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았던 빅 버킹엄의 공헌은 어쩌면 더 직접적이었는데 특히 그는 크루이프를 프로 무대에 데뷔시킨 장본인기도 하다. 다른 한 편으로, 1950년대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끄는 헝가리 대표 팀이 이미 토털 풋볼의 일부 개념(특히 포지션 체인지)을 활용하고 있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전체적인 스타일에 있어 틀림없이 ‘앞선 시대의 크루이프’로 간주될 만한 인물)야말로 ‘토털 풋볼러’ 그 자체였다는 견해들에도 당연히 일리가 있다. 또한 1960년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일부 클럽들에서도 이미 토털 풋볼과 같은 스타일이 시행되고 있었고, 1966 월드컵에서부터 스타가 된 ‘공격하는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는 가장 선명한 유형의 ‘토털 풋볼의 기수’로 평가받기도 한다.

‘토털 풋볼’의 위대한 사령관 요한 크루이프.
<출처 : wikipedia(Mittelstädt, Rainer)>

따라서 토털 풋볼은 거장 리누스 미켈스와 요한 크루이프만의 전유물은 아닌, 하나의 시대적 사조였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켈스-크루이프’로 이루어진 축구사 역대 최고의 ‘사제 드림팀’이 토털 풋볼의 아이디어를 가장 완성도 높은 형태로 체계화, 정립, 구현했을 뿐 아니라 파급력 및 역사적 영향력의 측면에서도 최고의 공헌을 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켈스와 크루이프가 ‘토털 풋볼의 표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토털 풋볼이란 무엇인가? 미켈스 감독은 상대가 볼을 빼앗아 나올 때 팀 전체가 뒤로 물러나 수비하지 않고 가급적 상대 골문과 가까운 위치에서 볼을 되찾아 공격을 재개하는 형태의 공격 축구를 원했다. 수비를 위해 완전히 후퇴한 후 다시 전진하는 축구는 도대체 효율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브라질 수준의 개인기 좋은 선수들이 팀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 한 이러한 방식으로 좋은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결국 미켈스의 선택은 수비 라인을 높은 지역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는 전방에서부터의 적극적인 ‘압박’으로 상대의 볼 소유권을 최대한 높은 지역에서 빼앗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실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선수들의 움직임은 ‘포지션’이 아니라 ‘공간’을 기준으로 펼쳐지게 됐다. 예를 들어 공격수들이 수비수의 역할을 수행, 상대를 압박해 볼을 탈취했을 때 효율적인 역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반대로 빈 공간을 파고드는 수비수나 미드필더의 공격 가담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동료가 비워둔 공간을 다른 동료가 메워주는 플레이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렇게 포지션과 역할을 수시로 변경하면서 ‘팀 전체가 공간을 기준으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토털 풋볼의 핵심이었다.

결국 토털 풋볼을 수행하는 선수들에겐 상황에 맞는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는 전술적, 공간적 센스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압박에 요구되는 체력, 그리고 무엇보다 수준급의 기본기까지 필요하게 됐다. 압박을 수행함에 따라 고갈되기 쉬운 체력을 최대한 안배하기 위해서는 아군이 볼을 지니고 있는 시간을 가급적 늘려야만 하는데, 이는 선수들의 기본기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미켈스의 위대한 구상이 그라운드 위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도 크루이프를 위시한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의 평균적인 우수성 덕택이었다.

특히 크루이프의 존재는 토털 풋볼의 완성에 있어 절대적인 것이었다. 크루이프는 스승 미켈스의 토털 풋볼 이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나이였을 뿐 아니라 판단력과 개인기, 스피드를 비롯 토털 풋볼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은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크루이프는 팀 전체의 ‘첫 번째 방아쇠’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크루이프가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나머지 동료들은 그의 발사에 맞춰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축구사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의 축구 두뇌와 모든 부문에 걸친 올라운드 재능이 아니었다면 실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16차례의 패스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네덜란드와 서독의 대결은 ‘토털 풋볼 vs. 토털 풋볼’이라 묘사될 수도 있으리만치 당대의 혁명적 사조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승부였다. 물론 네덜란드가 토털 풋볼의 정점을 치닫고 있던 팀인 반면 서독은 토털 풋볼의 기조가 다소 약화된 시점이었기는 하지만, 베켄바워로 상징되는 토털 풋볼의 일부가 서독에게도 남아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미 유럽을 제패한 클럽들인 아약스와 페예노르트 선수들로 구성된(롭 렌센브링크는 예외) 네덜란드는 감독 미켈스의 영도 하에 이미 대회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2차 조별리그에서 전 대회 우승팀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함으로써 토털 풋볼의 위력을 유감없이 떨쳐 보였다. 그 경기에서 크루이프는 자신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멋진 골을 터뜨렸으며 요한 네스켄스와 주고받는 플레이 또한 격찬을 받았다. 펠레는 떠났으되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존재했던 브라질은 결국 대회 4위에 머무르게 된다.

결승전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그리 어렵지 않은 우승을 예상했다. 실제로 경기 초반 그러한 예상은 잘 들어맞고 있었는데 특히 네덜란드가 터뜨린 완전무결한 첫 골이 그것을 예감케 했다. 크루이프의 킥오프로부터 시작된 네덜란드의 패스가 16차례 이어지는 동안 서독은 단 한 번도 볼을 만져보지 못했다. 볼은 결국 중원의 크루이프에게 되돌아왔고 크루이프의 드리블 돌파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까지 이어진 순간 급기야 서독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만다. ‘작은 요한’ 네스켄스가 그것을 성공시킴으로써 경기 시작과 더불어 스코어는 1-0. 네덜란드의 우수성이 다시금 증명된 장면이었다.

네덜란드는 단지 우승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독을 망신주기를 원했으며 첫 20분 동안은 그러한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나 서독은 베켄바워의 지휘 하에 그들의 주무기인 ‘신념’을 잃지 않고 있었다. 25분 경 베른트 횔첸바인이 얻어낸 페널티킥 장면에서 파울 브라이트너가 동점을 만들어냈고 베르티 포그츠는 투혼의 마크로써 크루이프를 묶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독은 게르트 뮐러의 골로 ‘예의’ 역전에 성공하고야 만다. 최고의 팀이 우승을 거머쥐지 못한 반면 개최국 서독은 20년 전의 ‘베른의 기적(무적 헝가리를 상대로 서독이 일궈낸 대역전 우승)’을 재현해냈다.

하지만 틀림없이 크루이프는 서독 월드컵 최고의 선수였고 그 해의 유럽 골든볼(발롱도르)도 베켄바워가 아닌 크루이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대회는 그의 선수 경력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본선이 되고 말았다. 1977년 10월 크루이프는 가족의 신변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국가대표 은퇴를 선택하게 되고,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우승 문턱에서의 좌절을 경험한다.


크루이프 턴
디 스테파노가 그러했듯 크루이프는 그라운드의 사령관일 뿐 아니라 개인전술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그는 이미 상대 선수를 제치는 일과 드리블에 매우 능숙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1974 월드컵 스웨덴 전에서 크루이프가 성공시킨 한 가지 동작은 크루이프의 뛰어난 개인전술을 전 세계 축구팬들 앞에 극명하게 드러낸 장면인 동시에, 기술과 두뇌를 겸비한 크루이프의 ‘창의적 발상’의 대표적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그 동작은 다름 아닌 이른바 ‘크루이프 턴(Cruyff Turn)’. 수비수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크루이프의 절묘한 ‘백힐 드리블’은 이후 세계 축구에 급속도로 펴져나갔고 축구 교본들에 등장하는 일반적 기술이 됐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축구황제 펠레와 매한가지로 월드컵 무대를 통해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페널티 패스
크루이프의 기발함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와 북미축구리그(NASL)를 거쳐 다시 네덜란드 리그로 돌아온 노장 크루이프가 커리어의 황혼기에도 불구, 여전히 녹슬지 않은 우아함을 과시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1982년 아약스가 헬몬트 스포르트를 상대했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차게 된 크루이프는 볼을 골문을 향해 차지 않고 왼쪽 앞으로 굴려버렸다. 이는 팀 동료 예스퍼 올센을 향한 ‘패스’였고 달려온 올센으로부터 다시 패스를 건네받은 크루이프는 어리둥절해 있는 골키퍼를 상대로 가볍게 득점을 터뜨린다.

이 페널티 패스(?)에 의한 컴비네이션 골은 축구사의 첫 시도로 기록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크루이프의 장난기어린 모험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먼 훗날, 크루이프의 ‘14번’을 흠모했던 아스널의 티에리 앙리는 로베르 피레스와의 유사한 컴비네이션 시도에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드림팀 바르셀로나
크루이프는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낸 대표적인 경우다. 선수 시절의 라이벌 베켄바워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들어 올렸다면, 크루이프는 클럽 축구계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성공들을 일궈냈다.

1988년부터 옛 소속팀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은 크루이프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스페인 라 리가 4연패의 업적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에 클럽 역사상 첫 번째 유러피언컵을 안겨줬다. 특히 크루이프 시대의 바르셀로나에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 로날드 쿠만(네덜란드), 미카엘 라우드롭(덴마크), 호마리우(브라질)와 같은 초특급 재능들이 존재, 바르셀로나 역사의 ‘초대 드림팀’으로서 영원히 기록된다.

선수 시절은 물론이고 지도자 시절에 이르기까지 크루이프 축구에 면면히 흐르는 토털 풋볼의 정신은 제자 호셉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지금의 바르셀로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17회 한일 월드컵 - 2002년

제17회 2002년 월드컵은 아시아의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총 31일간 치러졌다. 이 대회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두 나라의 공동 개최 형태로 치러졌으며, 유럽과 아메리카 이외의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부분의 강호들이 수준 높은 경기력을 선보였던 1998년 대회와 다르게, 2002년 대회는 그야말로 이변의 연속이었다. 최강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세네갈과 미국이 8강에, 대한민국과 터키가 4강에 오르는 대형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지뉴를 앞세워 안정된 경기력을 선보인 브라질은 통산 다섯 번째로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대한민국·일본, 2002년 5월 31일~6월 30일
참가국: 32개국
총 득점: 64경기 161골, 평균 2.52
총 관중: 2,705,197명, 평균 42,269
우승국: 브라질(통산 5회)


지역예선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와 함께 공동 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에게도 자동 출전권이 부여됨에 따라 티켓 배정 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피파는 2002년 월드컵이 아시아에서 치러지는 기념비적인 첫 대회임을 감안, 아시아 측에 1장의 티켓을 추가로 부여하는 대신 유럽과 남미의 티켓을 0.5장씩 축소시켰다. 그러나 아시아 3위 팀 이란은 아일랜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마시며 이러한 혜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유럽 예선에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변의 돌풍이 불어 닥쳤다. 2002년 예선에서 희생양으로 떠오른 팀은 다름 아닌 히딩크 감독의 모국 네덜란드였다. 클루이베르트, 반 니스텔로이, 다비즈와 같은 스타 선수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과 아일랜드의 벽을 넘지 못한 네덜란드는 결국 간발의 차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전통의 강호 유고 역시 세대교체 실패로 인해 이웃 라이벌 슬로베니아에 밀려 탈락했다.

한편 남미에서는 브라질의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부진이 예선 기간 내내 화제를 불러 모았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비엘사 감독의 지휘 아래 바티스투타, 베론, 오르테가, 아얄라 등이 막강 전력을 이루며 마라도나 은퇴 후 최강의 전력이란 호평을 받았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빠진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사상 처음으로 본선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으며, 오세아니아의 호주는 다시 한 번 남미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우루과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룹대륙티켓예선참가국본선진출국
1유럽1러시아, 슬로베니아, 유고, 스위스, 파로군도, 룩셈부르크러시아
2유럽1포르투갈, 아일랜드,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키프러스, 안도라포르투갈
3유럽1덴마크, 체코, 불가리아, 아이슬란드, 북아일랜드, 몰타덴마크
4유럽1스웨덴, 터키, 슬로바키아, 마케도니아, 몰도바, 아제르바이잔스웨덴
5유럽1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노르웨이, 웨일즈, 아르메니아폴란드
6유럽1크로아티아, 벨기에, 스코틀랜드, 라트비아, 산마리노크로아티아
7유럽1스페인,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보스니아, 리히텐슈타인스페인
8유럽1이탈리아, 루마니아, 그루지아, 헝가리, 리투아니아이탈리아
9유럽1잉글랜드, 독일, 핀란드, 그리스, 알바니아잉글랜드
10유럽4.5플레이오프: 벨기에-체코, 우크라이나-독일, 오스트리아-터키, 슬로베니아-루마니아, 아일랜드-이란벨기에
독일
터키
슬로베니아
아일랜드
11남미4.5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콜롬비아, 볼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 칠레
플레이오프: 우루과이-호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12북중미3최종예선: 코스타리카, 멕시코, 미국, 온두라스, 자메이카, 트리니다드토바고코스타리카 멕시코 미국
13아시아2.5최종 A: 사우디, 이란, 바레인, 이라크, 태국
최종 B: 중국, UAE, 우즈베키스탄, 카타르, 오만
아시아 플레이오프: 이란-UAE
대륙간 플레이오프: 아일랜드-이란
사우디
중국
14오세아니아0.5최종: 뉴질랜드-호주
대륙간 플레이오프: 우루과이-호주
-
15아프리카1카메룬, 앙골라, 잠비아, 토고, 리비아카메룬
16아프리카1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수단, 가나, 시에라리온나이지리아
17아프리카1세네갈, 모로코, 이집트, 알제리아, 나미비아세네갈
18아프리카1튀니지, 코트디부아르, 콩고, 마다가스카르, 콩고민주공화국튀니지
19아프리카1남아공, 짐바브웨, 부르키나파소, 말라위, 기니남아공


본선 요약
2002년 대회는 조별리그 초반부터 이변과 사건의 연속이었다. 전 대회 우승팀이자 최강의 우승후보 프랑스가 세네갈과의 개막전에서 0-1로 패한 것을 시작으로, 피구의 포르투갈 또한 미국에 2-3 역전패를 당해 충격을 가져다 줬다. 지역예선에서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던 아르헨티나의 초반 행보 역시 순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초반 흐름 장악에 실패한 세 팀은 조별리그의 벽을 넘지 못하며 귀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부상으로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 지단은 덴마크와의 마지막 경기 도중 무기력하게 쓰러졌고, 노쇠한 바티스투타도 스웨덴 전 패배 이후 뜨거운 눈물을 흘려 축구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 외에도 포르투갈의 피구가 탈락 이후 히딩크 감독과 포옹을 나누며 탈락의 아픔을 달랬다.

우승후보 포르투갈을 탈락시킨 개최국 대한민국의 상승세는 16강 이후에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탈리아마저 무너뜨린 대한민국은 8강에서도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이는 유럽 및 아메리카 이외의 국가로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4강에 오른 유일무이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브라질은 지역예선 부진을 딛고 본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스콜라리 감독이 승부수로 띄운 3-5-2 시스템이 대성공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3R’의 활약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결국 브라질은 독일을 물리치고 5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으며, 부상에서 돌아온 호나우두는 8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완벽 부활을 알렸다.



주요 선수
2002년 대회를 빛낼 최고의 스타로 손꼽혔던 지네딘 지단은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인해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지단은 프랑스의 탈락을 막아내지 못했고, 앙리 비에이라를 비롯한 스타 선수들도 조별리그에서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이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베론이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오랜 부상에 시달리던 호나우두는 이 대회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8골로 득점왕에 올랐음은 물론, 4강전과 결승전에서 고비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해내며 브라질 우승의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호나우두를 양 옆에서 보좌한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의 팀 공헌도에도 상당히 높은 점수가 매겨졌다.

그 밖에 독일의 올리버 칸은 골키퍼로서 최초로 월드컵 MVP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미하엘 발락 또한 남다른 해결사적 기질을 발휘하며 독일의 준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개최국이자 4강 진출 팀 대한민국에서는 ‘반지의 제왕’ 안정환이 스타덤에 오르는 한편, 박지성과 홍명보 등 주축 선수들 대부분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수상 기록
MVP
1위 올리버 칸(독일)
2위 호나우두(브라질)
3위 홍명보(대한민국)

득점
1위 호나우두(브라질/8골)
2위 미로슬라프 클로제(독일/5골), 히바우두(브라질/5골)
4위 크리스티안 비에리(이탈리아/4골), 욘 달 토마손(덴마크/4골)

베스트 팀
골키퍼: 올리버 칸(독일), 뤼스튀 레치베르(터키).
수비수: 홍명보(대한민국), 페르난도 이에로(스페인), 알파이 외잘란(터키), 솔 캠벨(잉글랜드), 호베르투 카를로스(브라질).
미드필더: 유상철(대한민국), 미하엘 발락(독일), 클라우디오 레이나(미국), 히바우두, 호나우지뉴(이상 브라질).
공격수: 호나우두(브라질), 미로슬라프 클로제(독일), 엘-하지 디우프(세네갈), 하산 사슈(터키).


한일 월드컵 이모저모
01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02년 월드컵의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
02
2002년 대회의 정식 명칭은 ‘2002년 한·일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다. 본래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2002년 일·한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Japan/Korea)’으로 명칭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대한민국 측에서 이에 반발함에 따라 명칭이 위와 같이 변경됐다.
03
피파가 대한민국의 반발을 받아들인 이유는 결승전이 일본에서 치러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피파는 “개막전은 한국에서, 결승전은 일본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대회 명칭 또한 같은 순서로 한다” 는 성명 발표와 함께 이 대회 정식 명칭을 ‘2002년 한·일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으로 확정 지었다.
04
특히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 주심을 맡았던 에콰도르 출신 모레노 심판은 이탈리아 측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라 레푸블리카>를 비롯한 이탈리아 일간지는 직접 모레노 주심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이 일간지의 기자들은 “당신은 월드컵에서 주심 역할을 수행하기엔 너무 뚱뚱한 것 같다” 는 등의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05
월드컵 폐막 후 모레노 주심은 칠레의 TV 방송에 출연, “나의 16강전 판정은 공정했다고 생각하며 이탈리아 측은 스스로의 패배를 오심으로 합리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뒤로 제쳐두고 어떻게든 경기에서 이길 궁리만 하고 있다. 이는 1930년대 무솔리니 시절부터 변치 않는 이탈리아인들의 습성” 이라며 판정 논란을 모두 일축해 버렸다.
06
반면 대한민국과 스페인의 8강전 선심을 맡았던 토무상게 알리 심판은 “사실 모리엔테스의 골을 취소시킨 것은 나의 실수였다. 물론, 고의는 절대로 아니었고, 내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라며 뒤늦게 오심을 인정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당시 스페인은 호아킨이 올린 크로스를 모리엔테스가 헤딩골로 연결시켰지만 그 전에 볼이 골라인을 넘어갔다는 알리 선심의 판정으로 인해 득점을 취소당했다.
07
그러나 대한민국의 골키퍼 이운재는 이 판정과 관련, “선심이 깃발을 들어 올렸기 때문에 일부러 플레이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만약 계속 플레이를 진행했다면 모리엔테스의 헤딩슛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며 알리 선심의 판정이 경기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08
한편 대한민국의 히딩크 감독은 온 국민들의 염원이자 목표였던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09
이 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당한 프랑스는 종합순위 29위에 머물렀고, 이는 전 대회 우승국이 다음 대회에서 거둔 역대 최악의 성적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월드컵 참가 역사상 최초로 본선 무득점을 기록했다.
10
전 대회 우승국에게 자동 출전권이 주어지는 전통은 2002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됐다. 그로 인해 2002년 우승팀 브라질은 2006년 대회 지역예선에 참가해야 했다.
11
2002년 6월 27일과 28일, 역대 최초로 FIFA의 관할 아래 월드컵 공식 콘서트가 일본에서 열렸다.